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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퍼즐조각/사회 이야기

[사건 이야기] 4월이 되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이야기 - 제주4.3 총정리

by 이야기퍼즐조각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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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야기퍼즐조각입니다.
각각의 모든 이야기퍼즐조각은 하나의 역사로 완성됩니다.

오늘은 제주4.3이 발생 75주년입니다.
제주4.3은 사건, 봉기, 사태, 학상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아직 정확한 이름을 갖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제주4.3은 아직 제주4.3입니다. 오늘은 제주4.3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 제주4.3의 시작

시간은 거슬러 1947년 3월 1일, 장소는 제주 관덕정입니다.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3.1절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말을 탄 경찰이 여섯 살 짜리 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아이를 돌보지 않고 그냥 가버립니다. 이에 군중들이 화가 나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를 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며 경찰들이 복동이 일어난 것으로 오해하여 도민들에게 총을 발사하였는데 무고한 도민 6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어린 학생도 있고 젖먹이 엄마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고 친일 경험이 있는 상당수가 미군에 의해 다시 경찰로 채용되면서 벌어진 비극입니다. 친일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앙금이 남아 있고 감정이 좋지 못한 건 당연하지요.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3월 10일 온 제주도민들이 대규모 총파업을 시작합니다. 참여율이 95%나 되는 전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 이를 반란으로 간주하여 제주도로 경찰과 군대 그리고 우익 청년 단체를 보내어 탄압합니다. 제주도를 인구의 70%가 빨갱이인 좌파분자의 거점으로 몰아갑니다. 이에 남한만의 선거 등으로 예민해 있던 좌익과 남로당 제주도당이 불안을 느끼고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제주4.3 이름의 기원입니다.

사실 제주4.3의 주원인은 4월 3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4.3이라며 명명한 것은 이 사건을 좌파세력 무장대의 봉기에 두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최초의 원인인 ‘3.1절 발포사건’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1948년 11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초토화 작전에 무게를 둘 수 있는 이름이어야 할 것입니다.

 

# 제주4.3의 절정, 초토화 작전과 대학살

제주도에 남아 있던 좌익 세력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놓고 여전히 제주4.3을 ‘빨갱이들이 일으킨 봉기’이며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집합소’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은 무고한 제주도민이었습니다.

제주4.3이 가장 절정에 달한 건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에서 오직 제주도만이 선거 보이콧을 하면서입니다. 이 때부터 정부는 제주도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합니다. 폭력적이기로 유명한 ‘정치깡패세력’인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급파하여 같은 해 11월부터 말 그대로 초토화 작전에 돌입합니다.

먼저 해안선으로부터 5km를 기준으로 모두 해안으로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 기준선 안쪽에 남아 있는 자들을 폭도로 간주하여 무차별적으로 총살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을 그렇게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거나 소식을 듣지 못한 많은 제주도민들이 제주산간 자신의 고향에 남아 있었습니다. 토벌대는 그들의 사정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고 마을을 통째로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학살하였습니다.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간 사람들도 집요하게 모두 찾아 죽였습니다.


초토화 작전과 대학살은 몇 년이 지나도 지속됩니다. 심지어 전쟁이 터져도 잠시 가라앉았을 뿐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총성이 멎은 건 1957년 최후의 무장대원인 오원권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이후라고 전해집니다. 

 

 

# 지금도 사계절 내내 제주 곳곳에 동백꽃이 피어 있다

거의 10년 간 총성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은 제주도민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기 어렵지만 최대 제주도민의 1/8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추정치는 3만 명에서 8만 명입니다. 제주도에서는 한 동네에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협동제사가 아닙니다. 각자 집의 제사입니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같은 날 각자의 가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때 입은 후유증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제주도민들이 많습니다. 초토화 작전으로 아랫턱이 없어져 평생 무명천을 두르고 살다 돌아가신 '무명천 할머니'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제주4.3을 세상에 최초로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을 보면 제주4.3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어려웠습니다.


한동안 아니 최근까지도 제주도에서는 무소속을 선호하였습니다. 기득권 세력당은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을 죽인 사람들의 당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투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대편 당을 찍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 다시 ‘빨갱이’라고 몰려 죽게 될 것 같은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제주어가 심각한 수준으로 사라졌습니다. 제주어를 쓴다는 것은 폭력과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가까운 과거까지도 제주도에서 제주어는 훈육의 대상이었습니다.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중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에 등록될 정도입니다. 말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문화와 정신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사라지는 것이죠.

제주4.3 희생자의 피가 묻지 않은 제주도 땅이 없을 지경입니다.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된다면 조금만 주변을 관심 있게 둘러 봐 주세요. 어렵지 않게 제주도 곳곳에 피어 있는 동백꽃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그 피해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태영호 국회의원이 2023년 2월 13일 ‘4.3 사건 북한 지령설’이란 근거없는 헛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어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에서 가해자 정순신 아들이 피해 학생에게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을 가지고 ‘빨갱이’라고 몰고갔다고 합니다. 자신은 다르다고 하더니 75주년 제주4.3 추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은 달랑 추념사만 보냈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빨갱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야 하는 걸까요. 반공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언제쯤 사라질까요. 언제가 되어야 제주4.3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사하는 사람들로 속출하는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저 지금보다 조금만 나아지기 위함입니다.


제주4.3 희생자분들을 진심으로 추모합니다.
제주4.3의 올바른 이름이 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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